전 세계가 K푸드에 열광하는 가운데 외국인이 주목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식문화가 있다. 바로 테이블에서 고기 굽기다. 한국인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를 불판에서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여건만 되면 구멍이 숭숭 뚫린 석쇠나 불판을 이용해 숯불에서 구워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일반 화구에서는 두툼한 철판이나 돌판, 흔한 프라이팬도 좋은 구이 도구가 된다. 이런 구이 문화는 벽화 등을 통해 이미 고구려 때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식 고기구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테이블 바로 위에서 직화로 굽는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테이블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는 곳은 극히 드물다.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서구에서는 스테이크가 일반화돼 있지만 주방에서 구워서 제공할 뿐 테이블에서 굽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우와 삼겹살 구이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테이블에서 구워 먹는 신기함이다.
독일에서 육가공 마이스터 자격을 획득하고 독일 분교인 한국바이에른식육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유병관 대표는 "독일에서 온 손님을 모시고 한국의 고깃집에 가면 집 마당에나 있는 바비큐 그릴이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 놀라고, 이어서 고기를 가위로 잘라주는 사실에 놀란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수백 년간 고기를 먹어 왔으면서도 가위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고기를 자른다는 생각을 못 해봤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이 문화에서는 고기를 어떻게 굽느냐가 음식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집게와 가위를 집어든 사람이 고기를 태우거나 잘못 구우면 질타를 각오해야 한다. 고기를 잘 굽는 사람들 중에는 집게와 가위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 넘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식당의 형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요즘은 식당에서 직원들이 고기를 구워주는 곳이 많다. 이런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부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마땅한 호칭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최근 들어 K푸드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가운데 고기구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전문적으로 고기를 구워주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 호칭을 정하고, 이들에 대한 직업적 인식과 처우 등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고깃집 중 한 곳인 벽제갈비·봉피양이 2022년부터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그릴 마스터 콘테스트'를 매년 한 차례씩 개최하고 있는 배경이다. 벽제갈비는 손님들에게 고기를 구워주는 직원들을 '그릴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콘테스트를 통해 입상한 그릴러들에게 3개 등급으로 칭호를 부여한다. 주니어 그릴러부터 시니어 그릴러, 마스터 그릴러가 그것이다. 민간의 이 같은 움직임에 호응해 그릴러라는 직업 창출에 주목한 지방자치단체가 바로 경기도다. 경기도는 고기 굽기 장인을 뜻하는 '그릴 마스터'를 새로운 직업으로 육성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매우 적극적이다. 김 지사는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커피 바리스타나 와인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며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릴러, 그릴 마스터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하지만 이를 직업으로 잘 육성하면 10년 뒤에는 그릴 마스터가 매우 훌륭한 직업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에는 직업 수가 1만2000~1만3000개 있지만 미국의 경우 직업 수가 3만개가 넘는다고 한다"며 "그릴 마스터라는 직업을 새롭게 만들어 냄으로써 K푸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국내 일자리를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계획의 실현을 위해 경기도농수산진흥원이 발 벗고 나섰다. 진흥원은 올 들어 봄과 가을 두 차례 '그릴 마스터 대회'를 열었다. 이들 대회에서는 한우와 한돈 분야 전문 그릴러들이 참여해 시연을 펼치면서 그릴 마스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진흥원은 올해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는 전국의 그릴러들이 참여하는 그릴 마스터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그릴 마스터 육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관련 자격증을 신설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릴 마스터에 대한 관심은 우리나라 국민의 육류 소비량 증가와 축산업 발전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한국인의 주식을 여전히 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제 한국인은 쌀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기 시작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육류 소비량이 작년 기준으로 60.6㎏을 기록해 쌀 소비량 56.4㎏을 훌쩍 넘어섰다. 사실상 고기가 한국인의 주식으로 부상한 만큼 이를 더 맛있게 먹게 만드는 그릴 마스터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외식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고깃집이 증가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된 고깃집 프랜차이즈만 200개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제 육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고기를 잘 구워주는 식당을 찾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농식품부 차관과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한 민승규 세종대 석좌교수는 "고기를 구워주는 분들에게 그릴 마스터라는 새로운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고기 굽기 장인'이라는 자긍심과 사명감을 심어주고 직업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한국의 외식문화를 진일보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축산업계에서도 그릴 마스터에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한우 마이스터인 임종선 가나안한우농장 대표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소고기를 생산하더라도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며 "그릴 마스터라는 직업이 많이 확산돼 소비자가 한우를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다면 축산업이 활성화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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