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흔여덟 해 만이다. 이 나라는 제 땅 위에 누가 서 있는지를 한 번도 끝까지 묻지 않았다. 1948년의 조사 이후 처음으로 농지에 번지수가 붙고, 면적이 적히고, 주인의 이름과 손이 착착 맞춰지고 있다. 올해는 농지 115만 헥타르, 내년에는 그 이전의 80만 헥타르다. 농지 소유자의 절반만 직접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 담당 부처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사가 끝난 뒤의 땅에는 무엇이 놓여야 하는가. 처벌의 목록으로 끝난다면 이 조사에는 두려움만 남는다. 고령의 농민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속받은 땅, 몸이 늙어 접은 농사마저 의심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 데이터는 겨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을 내기 위해 쓰여야 한다.
한편 친환경 농지는 줄어들고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유기 인증을 2.5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무농약을 2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늘리겠다고 한다. 두 배라는 숫자는 쉽다. 그러나 농부는 숫자로 짓지 않는다. 농약 없는 밭은 벌레와 함께 일하고, 수확이 흔들리는 해를 견디며, 그 불안을 받아 줄 식탁을 필요로 한다.
독일의 사례를 유심히 봤다. 1990년 통일 뒤 동독의 협동농장은 해체되었고, 농업 종사자는 백만 명에서 이십만 명 안팎으로 줄었다. 그 자리에서 몇몇 마을은 살아남는 방법으로 유기농을 택했다. 그들은 가까운 거대한 도시를 식탁으로 삼았다. 이 사례가 일러 주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친환경은 일자리가 될 때, 가까운 소비처가 있을 때에만 마을을 살렸다.
쿠바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건넜다. 소련이 무너지자 비료와 농약과 기름이 끊겼고 국영농장은 멈추어 섰다. 1993년 국가는 농지의 약 70퍼센트를 개인과 협동조합에 사용권으로 넘겼고, 도시의 빈 땅마다 텃밭이 일어섰다. 아바나에서만 3만 5천 헥타르가 경작지가 되었고, 도시가 먹는 신선 채소와 과일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거둔다고 한다. 땅과 사람과 식탁이 한 도시 안에 놓인 것이다. 가난이 낸 길이었으나 방향은 분명했다.
식탁을 먼저 만든 나라도 있다. 브라질은 2009년 법으로 학교급식 예산의 30퍼센트 이상을 가족농에게서 식재료를 사도록 했고, 2022년 평균 구매 비율은 45퍼센트에 이르렀다. 코펜하겐은 공공주방 구 백여 곳을 유기농 90퍼센트로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우되, 식비를 올리지 않을 방법을 찾는 데 공을 들였다. 판로가 법이 되면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안다. 누가 이것을 먹을지.
우리에게는 독일의 격변도, 쿠바의 봉쇄도 없다. 대신 서서히 오는 위기가 있다. 큰 충격이 닥친 뒤에야 땅을 다시 나누는 일은 가장 비싼 방식이다. 그러니 78년 만의 이 조사를 농업의 생산 구조를 미리, 차분히 다시 설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가. 물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래서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우선, 전수조사가 남기는 자료를 ‘농지의 지도’로 쓰자. 불법으로 판명되어 처분되는 땅과 방치된 땅은 공공이 먼저 매입하거나 위탁받아 비축하고, 친환경 전환을 약속한 청년과 신규 농업인에게 10년 이상 장기로 임대해 승계의 길까지 열어 두자. 상속 농지와 고령 농민의 땅은 지킨다는 약속, 자료의 사용 목적과 범위를 한정한다는 약속이 법에 먼저 적혀야 한다.
그리고, 친환경 공공급식을 법과 계약으로 설계하자. 학교급식과 조달 규정에 친환경 최소 비율을 정하고 해마다 올리며, 어린이집과 군, 복지시설과 병원으로 대상을 넓힌다. 광역 단위 지원센터와 전처리 시설로 흩어진 농가를 한 식탁에 묶고, 3년에서 5년의 사전 계약재배로 물량과 가격을 미리 약속한다. 수요가 먼저이고 면적은 그 뒤를 따른다.
아울러, 청년농에게 땅만이 아니라 판로와 집을 함께 주자. 친환경으로 전환하는 청년에게 공공급식 우선 물량을 배정하고, 첫 몇 해의 소득 공백을 직불로 메우고, 농지와 주거를 한 묶음으로 내어 준다. 땅값에 막혀 돌아서던 이들이 비로소 문턱을 넘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후를 같은 지도 위에 겹쳐 놓자. 가뭄과 폭염과 침수의 위험을 농지 자료 위에 얹어 지역별 작목을 다시 짜고, 탄소중립직불제에 이어 친환경 전환이 곧 기후 적응이 되게 한다. 생산 구조를 다시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어느 땅에 무엇을, 누구의 손으로 심을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흙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만 오래 기억한다. 누가 돌보았는지, 누가 버려두었는지를. 한 아이가 학교 식당에서 숟가락을 드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 숟가락 위의 한 알이 어느 밭에서, 어느 사람의 손을 거쳐 왔는지 우리가 알게 되는 일. 일흔여덟 해 만에 땅의 이름을 불렀다면, 이제는 땅이 부르는 이름에 대답할 차례다.
